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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주혁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故 김주혁씨는 필자도 좋아하던 배우 중 하나였다. 뭔지 모를 따스함과 인간미가 남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인 듯 하다.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배우로서의 그는 매력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연인 이유영씨는 (인터넷에 공개된 차트 기준) ‘리플렉터Reflector’가 아니던가. 그의 사망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그의 연인 이유영씨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그녀의 ‘반영적’ 디자인이 故 김주혁씨에게 주었으리라 짐작되는 존재적 메시지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김주혁씨는 그녀를 통해 자신을 많이 보게 되었을 것이고, 자기 치유적인 경험들을 가졌을 것이다. 몇 가지 영상들을 찾아보고, 기사들을 읽다가 오늘의 트랜짓에 시선이 멈췄다. 

 

TRANSIT

이미지. 2017년 10월 31일 오전 1시 47분 현재 트랜짓(사망 시각 포함)

 

28.6 ‘영광의 불꽃‘ – 퇴보의 법칙에 굴복하기 보다는 희생함

 

▲ 비용이 얼마든지 재생하고 개선함.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기려는 깊은 직관적 동력

▽ 자기 파괴. 투쟁의 때에 잠재적으로 심오한 절망과 패배에 대한 깊은 직관적 두려움. 

 

기본 과정을 배운 자들이라면 이 트랜짓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한, 그리고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고통과 우울감이 인류를 뒤덮는 기간이다. (목성에 있는 28.3 ▽도 주목하라.) 지난 6일의 트랜짓 기간 중 많은 이들이 좌절과 고통, 그리고 목적없이 살아가는 삶의 고뇌를 겪었다. 어제와 오늘은 그 투쟁의 종착지로, <인간 메커니즘>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살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28.4가 들어온 시점부터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내뱉었다. 그리고 트랜짓을 알고 나선 충격에 휩싸였다. 트랜짓은 정확하다. 물리적 조건화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은 매년마다 찾아오는 ‘비자아 조건화(레이브 리턴Rave Return)’, 그리고 매일의 트랜짓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러져간다. 

 

어제로부터 이어진 현 시각의 트랜짓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태양 다음으로 뉴트리노 조건화가 가장 강력한 목성에 28.3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강으로) 그리고 이 둘은 조화 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이 만들어내는 주파수 조합은 인간 본성의 기반을 그 뿌리부터 가차없이 흔들 수 있다. 당신이 살면서 트랜짓으로 만날 수 있는 28번 관문들의 조합들 중 가장 강력한 조합에 속한다. 다시 말해, 당신은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엄청난 어려움들을 직시해야 한다. 

 

28.3(모험주의)의 하강은 70억 인구 전체에 다음의 조건화를 불러 온다. 위험 감수가 합리화되고 실패가 확실시되는 목성 확장의 왜곡된 현시. 투쟁의 때에 위험감수에 대한 직관적 합리화.

 

조심스럽게 추정컨대, 그의 심근경색 또는 심신이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면 어제의 사고가 일어나기 전 자가운전은 그에게 무리였을 수 있다. 우리는 트랜짓을 통해 그의 죽음의 전혀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여기서 트랜짓 해석의 원리를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참고로 1년 과정의 ‘트랜짓 학교Transit School’를 준비 중에 있다.) 최진실씨 죽음 이후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 중 하나라 여겨질(인터넷 댓글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번 사건은 정말이지 인간 이해를 넘어서는 우주적 프로그램의 실체와 그 앞에 선 인간의 무능력함에 대한 메시지일 수 있다. 

 

나는 휴먼 디자인을 배우는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과 호기심을 넘어 충격에 압도되는 광경을 자주 목도한다. 당연하게도,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휴먼 디자인과 휴먼 디자인을 통해 맛볼 수 있는 트랜짓 지식은 이 지식이 실용적이라 여겨지는 수준을 넘어, 이런 진실들 앞에 숨이 멎을만큼 압도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뉴트리노는 이미 증명된 과학적 실체이므로, 뉴트리노가 가져오는 전 우주적 정보의 프로그램은 인간 또한 정교한 프로그램의 일부이며, 이를 벗어날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나의 20.6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언제나 더 많은 정보들을 말하고자 했을 터이다. 

 

그의 죽음은 나의 다소 차분한 문체와는 달리 내 가슴에 깊은 슬픔을 안겨 주었다. 인간 존재의 무력함, 인간 삶의 덧없음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신도 생각해 봐야 한다. 뭔지 모를 우울감 뒤에 존재하는 인간 삶을 향한 거대한 힘에 대해서 말이다. 28번 관문이 인간에게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세상 그 누구도 삶의 의미를 피해갈 수 없으며, 목적없는 삶을 살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트랜짓을 피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므로 당신도 지난 6일간 이 흐름 앞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거대한 명왕성 프로그램이 54번 ‘야망’의 관문으로부터 장막을 벗겨내기 시작할 때, 인류는 24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금 삶의 신비에 압도되기 시작할 것이다. (54번 관문이 명왕성에 위치한 이 시기에 휴먼 디자인 역사상 가장 큰 부패 사건들이 전 세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생각해 보라. 현재의 54.3 트랜짓은 ‘비밀스러운 교류’로, 돈을 벌기 위해 은밀한 수단을 쓰는 추진력이다. 어디 휴먼 디자인 네트워크뿐이겠는가. 이 현상은 국내 정치판과 국제 정세 속에서도 확연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부패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들조차 현재의 트랜짓 속에 함께 있으므로 정신적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정신적 주파수의 왜곡때문에 바른 인식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다. 49번 관문과 54번 관문이 트랜짓에 존재하는 지금, 인류의 상당수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매우 기만적인 선택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

 

나는 종종 휴먼 디자인의 경이로움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얼마나 경이로운가. 인류가 생각을 갖게 된 이래,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설계도를 손에 쥐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때가 허락지 않았고, 앎의 진전이 더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한번의 태어남만으로는 전 우주적 실체에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다. 뉴트리노의 실체가 규명되고, 빅뱅의 실마리를 풀어줄 단극자석에 대한 연구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 우리는 매우 놀라운 지식을 마주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건인가. 휴먼 디자인을 배울 기회가 당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지적 생명체 전체 대비, 0.0000000001% 밖에 안 되는 확률이다. 

 

트랜짓은 경이롭다. 그리고 트랜짓은 무섭다. 바른 태도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선물과도 같은, (그러나 종종 힘든 시기를 동반하는) 아름답고 풍성한 여정을 제공하지만, 합리화하고, 악용하는 (사실은 트랜짓에 끌려 다니는 것에 가깝다.) 자들에게는 프로그램에 갇히는 저주를 내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는 자유의지적 과정이 아닌, 트랜짓과 프로그램의 작용이기 때문에 차트를 보고, 이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적용하기 전까지는 당신은 <메이즈 러너>의 그들처럼 끝없이 배열을 바꾸는 미로 안에 완전히 갇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절망을 생각해 보라. 프로그램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결코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없다. 

 

나는 28.3과 28.6이 서로를 완전히 강화시키는 이 강력한 조합과 배열 속에서 사람들이 신이라 부르고, 종교적 체험이라 부르는 그 어떤 힘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오늘의 트랜짓 13개 속성 전체를 믹스시키면 더 정확하고, 더 소름돋는 실상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 마인드는 삶을 이해하고자 애쓴다. 그러나 지성인들은 지성의 실체를 알지 못하므로, 자신의 똑똑함에 짓눌린다. 나는 항상 두렵다. 아니 경외감 속에 압도된다. 한편엔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살고자 하는 바른 태도를 가진 학생들이 있다. 다른 한편엔 자신의 에고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오히려 휴먼 디자인과 더불어 늪에 빠지는 존재들이 있다. 

 

휴먼 디자인은 양날 선 검과 같으므로, 이 검으로 자신을 베고 자르는 이들은 앞으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기본 과정을 통해 배운 것처럼, ‘제대로’, ‘정확히’ 배우면 마인드가 빠져 나갈 구멍은 없다. 

 

당신의 마인드는 길을 잃었다. 트랜짓이 당신에게 주어졌으므로 고뇌하고 고통받겠지만, 자신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감내하지 않기에 당신이 돌아갈 집은 여전히 없을 것이다. 

 

프로그램은 아무도 편의를 봐 주지 않는다. 당신이 자신으로 살기를 거부하면 프로그램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것이다. 인간 존재의 신비는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배우고, 물러남에 있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수근거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저주받은 자들은 저주받은 자의 삶을 산다. 그들 옆에는 또 다른 저주받은 자들이 있다. 영원의 문을 선택하지 않는 자들은 돌아갈 수도 없고, 더 나아갈 곳도 없는 거대한 늪에 빠진다. 

 

휴먼 디자인은 언제나 전략과 권위를 말하며, ‘오직’ 전략과 권위를 말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오직, 전략과 권위만 말하지 않는다. 태도에 대해서만 언급을 피한다. 자신의 낯빛과 바디랭귀지를 살피지 않는다.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생각지 않는다. 

 

매 순간의 경험들은 언제나 메시지를 가진다. 당신은 (금주의 트랜짓으로 인해) 온 국민이 공감할 만한 이 슬픔 속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 

 

모든 일엔 뜻과 교훈이 있다. 한 주간 당신을 흔들어 놓은 이 트랜짓은 트랜짓의 정점인 6번 라인의 날에 그 자체의 우울감을 넘어선 더 큰 의미와 슬픔을 안겨 주었다. 

 

당신은 위선자인가? 

 

스스로 답하라. 

 

 

 
휴먼 디자인 한국본사
레이브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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