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당신은 그저 자신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다. 다른 목적은 없다. 자신됨이 무엇인지, 진정한 차별화가 무엇인지 ‘보기 위해’ 삶이 주어진 것이다.  

보는 것은 특권이다. 식물은 보지 않는다. 식물은 태양 에너지를 에너지원으로 삼는다. 인간은 태양 에너지를 보는데 사용한다. 우리는 빛을 통해 보고 이 광대한 마야를 창조한다. 우리는 이 거대한 ‘마야maya‘ 속에서 자신이 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이 당신 삶에 주어진 숙제다.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하다. ‘당신은 이런 존재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각각의 관문은 전통 주역의 괘와 직접 대응되고, 각각의 관문은 또한 코돈codon(단백질과 아미노산을 만드는 유전 물질)과 대응한다. 
 
우리는 단지 이틀간의 LYD 과정 하나만으로도 깊은 쇼크를 받을 수 있다. ‘정의’와 ‘미정’, 이 차별점 하나만으로도 삶에 대한 관념이 뒤바뀐다. 정의와 미정, 열려있고, 닫혀 있음이라는 이 단순한 식별 하나만으로도 인간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무너진다. 우리는 본성상, 극도로 조건화되게끔 디자인되어 있다. 실로 엄청난 조건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64관문 밑에는 각 관문마다 6개의 ‘라인lines‘ 값이 존재한다. 라인은 당신의 개별성을 특징지어 주는 표면적 개념이다. 라인 밑에는 6개의 ‘칼라colors‘가 있다. 칼라는 당신을 움직인다. 각각의 칼라 밑에는 ‘톤tones‘이 있다. 톤은 당신을 설계한다. 각각의 톤 밑에는 5개의 ‘베이스bases‘가 있다. 베이스는 당신이 세상의 존재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각 관문에 존재하는 1,080가지 변수값은 64관문과 더불어 69,120가지의 조합을 가져 온다. 여기에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각각의 행성의 특질을 더하면 사실상 무한대의 조합이 출현한다. 인간의 독특성, 차별성이라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마치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이 온 우주를 뒤엎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거대한 균질화 바다에서 자신만의 독특함을 발견하고 성취해야 하는 엄청난 미션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좌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엄청난 복잡성 속에서 자신됨을 발견하고 실현한다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애초부터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었다. <메이즈 러너Maze Runner>에 등장하는 거대한 미로, 그런데 이 미로가 움직인다. 트랜짓transit(매일, 매순간의 뉴트리노 날씨)이 그렇게 작동한다. 보이지도 않는데, 인간 삶을 통제하며, 인식되지도 않는데, 그 구조가 바뀐다. 트랜짓은 복잡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무한대의 조합으로 우주를 프로그램한다. 뉴트리노neutrino가 대리인이다.  
 
매초마다 엄청난 정보가 쏟아져 내린다. 장마철의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허공을 가르는 천둥번개처럼 인간 존재를 관통한다. 인간은 매일, 매순간 거대한 정보장을 처리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인식은 이 정보를 다 처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이상자가 많을 수 밖에 없다. 
 
계산 자체가 불가하다. 어떤 천재적인 지성의 노력을 통해서도 이 조건화, 이 프로그래밍을 감당할 길은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인간 삶은 이래야 한다는 기준과 잣대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 대부분이 노년에 비참하게 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무지하다. 무지한 동물이다. 답이 없다. 생각하는 기능이 저절로 주어졌으므로, 생각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없는지도 그리 잘 알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쳇바퀴 속에 있던 다람쥐는 누군가 밖으로 꺼내 주기 전까지는 쳇바퀴를 벗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누구도 프로그램을 비켜갈 수 없다. 성인도, 현인도, 깨달은 자도, 종교 지도자도, 아이도, 엄마도, 선생도, 그 누구도 프로그램 자체의 영향력을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한다. 프로그램은 애초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에게도, 인간 개개인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형체 원리Form Principle와 목적의 달성을 위한 변이를 가져올 뿐이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형체 원리는 그저 실험을 위한 또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모든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의 삶을 살면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오직 그럴 때만 삶이 의미를 갖는다. 
 
분별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혹자들은 이제 휴먼 디자인을 알았으니 7년간 실험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식사법을 잘 지키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 인간됨을 식별하고, 독특함을 실현하는 과정은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다. 총체적인 노력없이는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결코 실현시키지 못한다. 
 
별은 시간이 되면 죽는다. 자체의 중력으로 붕괴하여 자신 안으로 자유낙하한다. 별이 초신성supernova 되고, 초신성 폭발로 원소들이 합성된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별이 탄생한다. 별은 죽고 새로운 별이 된다. 인간의 변화가 이와 같다.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만나면 당신 존재가 ‘관통된다.’, 기존 삶이 자체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한다. Ra가 그랬다. 평범한, 그러나 매우 똑똑한 한 인간이 휴먼 디자인을 만나면서 자기 존재가 완전히 죽고 사라져 버렸다.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만나는 사람들은 온 존재가 으스러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더 이상 기존의 방식대로 살 수 없다는 엄청난 절망에 빠진다. 사이비들은 이 경험을 제공하지 못한다. 자신이 그런 경험을 해 보지 않았으므로 다른 존재를 깨울 일도 없다. 잘못 배우면 다시 태어날 일도 없다. 되레 자신의 비자아를 강화시키고 에고를 강화시킬 뿐이다. 진실 앞에 무너져 본 경험이 없다. 
 
휴먼 디자인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려 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지식이다. 쇼크 그 자체다. 그 누구도 진정한 충격없이, 자신 안에서 내적으로 붕괴되는 경험없이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만날 수 없다.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동안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은 계시록적 축복이다. 뇌가 주어진 것처럼, 생각이 주어진 것처럼, 인간에 대한 앎도 그저 주어질 뿐이다.  
 
인간은 그저 받은 것을 활용한다. 그것이 그저 인간의 역할이다. 인간은 한계를 지닌 존재다. 삶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인간은 그저 주어진 삶을 살며 삶이 보여주고 허락하는 광경을 목격할 뿐이다. 
 
당신은, 지금 여기서, 이 거대한 진화의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내가 휴먼 디자인을 하는 이유다. 당신이 휴먼 디자인을 찾는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