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환상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는 무지의 산물임이 현대 과학에 의해 밝혀져 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 믿고 싶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믿음이란 것이 에고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지탱될 수 없음을 인류는 이제 알고 있다.

휴먼 디자인은 우리의 환상을 깨뜨리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최적의 도구다. 각자에게 주어진 속성들 즉 정의된 센터, 정의된 채널, 정의된 관문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항상 작동할 뿐 아니라 우리가 영향을 미칠 방법도 없다.

모든 불수의근不隨意筋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지에 대해서조차 결정할 권리를 가지지 않는다.

당신 차트에 ‘머리Head 센터’가 정의되어 있고, ’61번 관문’이 정의되어 있다면 당신은 언제나 ‘삶의 신비’와 ‘우주의 기원’, 그리고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질문들에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삶의 신비에 답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므로, 당신은 자신의 다른 일상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이 부름에 응답(61.1이 하강할 때)해야 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언제나 ‘전략’과 ‘주도권’을 따라야 한다.)

무엇을 생각할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당신은 노예인가? 아님 로봇인가? 겉으로 보기에 우리 각자가 원하는대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바로 이 부분이 전 인류가 오랫동안 속고, 또 속아왔던 영역이다. 우리는 이 인과관계를 제대로 연결짓지 못해 왔고, 그래서 나타나는 결과들과 원인들을 종합적으로 숙고하거나 교훈을 얻지도 못했다.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생각은 단연코 ‘마음mind’이 빚어내는 환상이다. 당신이 바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거대한 착각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사처럼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라는 생각이 인류의 마음을 오랫동안 장악해 왔다.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건만, 정작 이 문장 속에는 인간 메커니즘을 철저히 무시하는 ‘마음’, 그리고 ‘에고ego’의 거만함이 묻어있다.

당신은 당신 영혼의 선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렇게 디자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삶에 대해 ‘선장driver’이 아닌, ‘승객passenger’으로 살도록 디자인되었고, 이와 더불어 의사결정을 내리는 존재로 디자인되지 않았다. ‘마음’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수 천 가지의 변수들을 모두 계산하여 무엇이 자신의 삶에 필요한지를 시시때떄로 결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모두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인간은 의사결정을 ‘내리는’ 대신, ‘내려진’ 의사결정을 ‘따를 것인지’, ‘아닌지’만을 선택하도록 디자인되었다. 그것이 바로 휴먼 디자인이 말하는 ‘내부 권위inner authority’ 즉 ‘주도권’이다. 생소하고, 다소 거슬리기는 하지만 인간은 ‘마음mind’을 통해서는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아니 그런 한계를 지니도록 디자인되었다. 다시 말해, ‘머리 센터’와 ‘아즈나 센터’는 영감을 얻고, 생각하는 기능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알려주지 못한다. 애초부터 우리 회로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어진 질서를 따르지 않거나, 인간이 가진 한계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이 날 수 있다 믿고 절벽 아래로 뛰어든 사람처럼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나의 행성 이야기My Planet Story’라는 세미나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한계지어져 있는지, 우리 각자에게 심겨진 ‘법laws’이 무엇인지 숙고해 보았다. 그리고 이 법을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고통이 일어날 수 있는지도 똑똑히 보았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맥락들이 많았지만, 함부로 불평하기엔 인간의 한계가 너무도 뚜렷해 보였다. 인간은 신神이 아니며, 그렇기에 우리는 일정 차원에 갇혀 있고, 제약된 조건들 속에서 질서에 순응하며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왠만한 사람이라면 길거리에서 함부로 소리를 지르거나, 지나가는 사람을 발로 걷어차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르는 결과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남의 집 담장을 함부로 넘지도 않는다. 월담하다 발각되면 경찰서에 끌려가 곤혹을 치러야 할 텐데, 해서는 안 될 규칙들이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알 때 불평은 사라지고, 건전한 두려움과 질서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다소 불편할지언정, 인간은 아니 ‘집단collective(‘집단회로’를 뜻함)’은 미래를 담보키 위해 모두가 지켜야 할 규칙을 제정한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않는, 불평하는 소수를 희생해 다수의 생존을 담보하려 한다. 우리 모두가 사회시간, 도덕시간에 배웠던 사실들이고 실제로 유익함을 알기에 묵묵히 따름으로써 개인의 일상 또한 이 틀 안에서 보호받게 된다.

당신의 디자인은 매우 독특하다. 차트엔 26개의 속성(의식 13개, 무의식 13개)이 부여되어 있고, 이 속성들은 당신의 독특함, 고유함을 드러내 준다. 차트에 나타난 정보들은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을 알려 주며, 당신이 인간으로써 지켜야 할 삶의 규범들을 알려 준다. 이것이 바로 ‘법’이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법을 존중하며, 그 안에 살 때에만 인간으로서 가치있는 삶, 존엄한 삶을 살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정말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끔찍하고 참혹한 삶의 현실들이 즐비하다. 이런 삶의 모습이 어떤지 알고 싶다면, 그냥 TV를 켜고 채널을 아무 곳으로나 돌리면 된다. 그러면 당신은 ‘영화같은 현실’을 보게 될 것이며, 이 삶에는 ‘천국’과 ‘지옥’ 두 가지 양상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될 것이다.

휴먼 디자인을 접한 뒤, 항상 2가지 버전의 반응이 나타난다. 삶의 질서를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 그리고, 불쾌함과 거만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 휴먼 디자인이 제공하는 극도의 정교함은 벗어날 구멍이나, 변명의 여지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누군가에게는 일생일대의 변환점이 될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찝찝하고 소름끼칠만한 불편함을 남기게 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는 것처럼, 뭔가 거대하고 근본적인 변화가 코 앞에 다가와 있다. 이 변화는 단지 수 백 개의 직업이 사라지고, 경제위기가 오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2027년을 기점으로 우리는 거대 기업들의 몰락을 보게 될 것이며, 더 많은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밖으로 내몰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 미래는 이미 여기에 와 있다.

일반 자영업자들에게 사업이란, 1~2번 망하면 답이 없는 게임이다. 그런데 이 게임을 대게 제대로 된 준비없이 시작한다. 베팅액은 1~2억. 손실액과 빚은 눈더미처럼 불어나 결국 자살로, 가정불화로, 불치병으로 그를 몰아간다.

세상에는 이 삶을 제 멋대로, 마음가는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여기엔 ‘임계점’이라는 주요 변수가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그럭저럭 균형을 잘 잡고 살아왔다면 약간의 불균형은 오히려 건강한 자극이 될 수도 있다. ‘목성Jupiter(목성에 포함된 관문과 라인)’은 우리가 인생 규칙을 잘 따르며 살 때 종종 너그럽고 관대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내면의 느낌을 강하게 거스를 정도로 이 법칙을 위반하면, 세상의 무서운 맛을 보게 될 수도 있다.

휴먼 디자인은 ‘몸의 과학’, 그리고 ‘유전적 메커니즘’이라는 차원에서 기존의 여느 도구들과 다르다. 휴먼 디자인은 우리 몸이 작동하는 유전적 메커니즘 그 자체, 다시 말해 날 때부터 주어진 불변의 설계도를 다루기에 잘 알아 두어야 하며, 또 조금이라도 더 기회가 있을 때 삶을 되찾는 지표로 삼아야 할 도구다. 412년 단위로 찾아오는 이 거대한 변화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기 자신으로 사는 법을 당신도 배워야 한다. 당신에게 어린 자녀가 있다면 그 필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이 삶을 자신의 뜻대로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이 삶에는 우주로부터 허락된 거대한 계획과 흐름이 존재한다.

나는 당신도 이 흐름 속에 동참하기를, 그래서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자신과 함께 남은 삶을 의도된 대로 펼쳐내기를 염원한다. 메커니즘을 벗어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너무도 크다.

 

 

 레이브 코리아 대표 Paul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