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휴먼 디자인은 당신이 만난 절호의 기회입니다. 
레이브 코리아 / Paul Park

 
 

그렇다. 붓다가 고통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 말했을 때, 그래서 4가지 원리를 알지 못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했을 때 이는 우리 모든 인류를 향한 말이었으리라. 

 
인간의 삶은 어느 시대, 어떤 문명을 막론하고, 어느 누구의 모습을 통해서든 별 다름이 없었다. 고통은 돈이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을 학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전염병도 아니었다. 이건 마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사람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갈 능력이 없을 때 겪는 고통과 다르지 않다. 왜 서로를 그토록 이해하지 못하는지, 세상은, 그리고 인생은 왜 이리도 가혹한지, 정말이지 우주가 나를 일부러 고통에 빠뜨리려 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만하지 않은가.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려 애써 왔다. (그래봤자 고작 2~3천년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종교’와 ‘과학’ 사이에서 가장 쓸데없는 사변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철학자라며 비꼬지만, 정녕 이들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고민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이지 않았는가. 그들은 ‘인식론’을 발전시켰고, 인식되는 세계의 바탕이 되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 발버둥쳤다. 

 

그런데 누군가의 지적대로 ‘왜 없지 않고 있을까?’, ‘왜 이런 모습이어야만 하는 걸까?’, ‘왜 인간만이 고등의식을 가지고 있는 걸까?’ 정말이지 인간에게 고등의식을 발전시킬 신피질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민은 아예 시작조차 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소위 말하는대로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진화론자들은 후두의 위치가 영장류의 그것과 달라지기 시작하고, 신피질이 생겨난 8~9만년 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자율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 출현했다고 보고 있다.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건만, 우주의 역사는 150억년이고, 지구의 역사는 50억년이며, 인류의 역사는 고작 15만년이다. 도대체 이런 인간이 왜 필요한 걸까? 여기에 종교와 신화 이야기가 곁들여지기 시작하면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인간에게만 ‘허락된(?)’ 자의식을 토대로 보건대, 우리는 생각하는 과정을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 우리가 가지려 해서 가지게 된 것은 아니고, 그냥 저절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는 마치 위대한 음악가들이 악상이 떠올라, 그냥 그것을 받아적는 일에 비견할만 하다. 지금도 모든 위대한 창조는 우리의 노력이 아닌 ‘저절로’ 이뤄지고 있다. 이는 휴먼 디자인의 첫 관문, 첫 라인의 의미가 의미하는 바이기도 하다. (‘1.1′, 다시 말해 ‘1번 관문’의 ‘1번 라인’은 창조는 인간의 의지와 관련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 뜻대로 되는게 어디 있겠는가?)
 
자유의지 논쟁은 태생부터가 ‘마음mind’의 산물이었음을 안다면, 다시 말해 전, 후 관계상으로 ‘마음’의 출현이 있고 나서야 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리 고집피울 만한 일은 아닌 듯 싶다. 붓다가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말했을 때, 이는 바로 휴먼 디자인이 말하는 바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휴먼 디자인이 그냥 지나가 버리는 유행이 아닌 이유는 많다. 기존 천문해석학과 명리학이 출생년/월/일/시를 중요하게 다룬데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와서야 그 비밀이 ‘뉴트리노nuetrino’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조차 이들 전문가들은 지구 밖 여러 행성들의 궤도 변화가 인간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는 뉴트리노 각인의 영향을 받아, 특정 디자인을 평생 지니게 된다. 성별, 머리카락의 색깔, 당신을 낳아준 부모가 불변이듯 우리 디자인은 뉴트리노에 의해 불변하는 속성을 부여받는다. 
 
세계 7대 불가사의니 8대 불가사의니하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 마음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스스로 세운 (증명불가능한) 공리와 논리에 따라 인과관계의 오류가 없는 체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필자는 앙코르와트를 방문할 당시, 현대 기술로도 300년이 걸리는 건축물을 이들은 불과 수십년 만에 완성했다 들었다.) 물론 인간 이성 덕에 현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는 고작 8~9만년 전에 생겨난 도구에 집착해 삶의 신비, 문명의 신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기원과 마음의 기원을 고찰해 볼 때, 우리의 상태는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이 세트장 안에서 감독의 의도를 이해해 보려 애쓰는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이 노력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반면,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애초부터 마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허락되었다면 언젠가 때가 이르러 알게 되겠지만, 허락되지 않는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60.1’이 말하는 바가 그러하듯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인간은 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전지한 존재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휴먼 디자인은 그 기원상 인간 본성의 한계를 생각하게 한다. 무얼 모르는지도 모르는 인간의 마음은, 무언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정녕 모를 것이다. 삶의 모든 신비가 그러하듯, 우리는 휴먼 디자인을 대함에 있어, 여타의 학문들과 같은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한의학의 기원이 그러하듯, 수학의 기원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공리를 기반으로 하며, 이 공리는 어차피 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냥 실용적인 결과를 얻으면 그 뿐, 인간은 마음이 어떻게 학문을 해 내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휴먼 디자인은 이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휴먼 디자인은 당신이 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그리고 마음이 이 삶의 주인인 것이 아니라, ‘승객’, ‘목격자’일 뿐이라 얘기한다. 이는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근거없는 괘변은 더더욱 아니다. 아마도 무지한 인간은 강제로 동굴 밖으로 끌려나와서야 동굴 밖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에, 동굴 속에 있는 사람들에겐 동굴 밖으로 나가는 충격이 필요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휴먼 디자인이 ‘쇼크’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이유이며, 휴먼 디자인이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알 수 없었던 놀라운 지식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이유이다. 인간은 자신이 처한 고통에 대해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지금 휴먼 디자인을 통해 ‘몸’과 ‘마음’,’ 괘’와 ‘코돈’, ‘의식’과 ‘무의식’이 만나는 지점을 목격하고 있다.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의 운명도 나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충격을, 이 여행을 함께 즐겨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