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디자인 실험의 본질, 그리고 ‘자기기만’

 
 

정말 괜찮을까? 당신의 삶 말이다. 정말 괜찮을까? 거기에 ‘자기기만self-deception‘은 없을까? 

사람들은 삶을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고, 흘러가는 대로 내맡겨 버린다. 여기서 ‘흘러가는 대로 내맡긴다.’는 말은 ‘흐름을 따른다.’는 말이 아니다. ‘균질화’된, 다시 말해 자신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페르소나persona‘와 ‘비자아not-self‘로 가득 찬 삶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망가져 있고, 무너져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겉만 그럴 듯한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그들은 자신들이 꽤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삶이죠?’ 천만의 말씀이다. 이는 흡사 비행기를 딱 한 번 타본 사람이, 비행기의 구조가 어떻고, 비행감각은 어떻고 하며 거드름 피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휴먼 디자인 실험은 아무나 쉽게 거론할 수 있는 가벼운 주제가 아니다. 이 실험은 본질적으로 자신 아닌 것들을 벗어버리고, 자신으로 살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을 의미한다. 꼭 치열해하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처음 2~3년간은 그렇다. 십수 년간, 아니 수십 년간 덕지덕지 붙어있던 ‘비자아’ 고통을 다루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 뭔가 재미있고 신기한게 있어 왔다가 이내 발걸음을 돌린다. 
 
사람들이 휴먼 디자인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용때문이 아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오랫동안 사람들을 훈련하면서 돈이 없어도 절실함때문에 훈련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힘겨운 투쟁을 해가며 비용을 충당했고, 어떤 사람은 천금같은 흐름이 주어져 이를 능히 감당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본질은 돈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생각해 보자면, 사람들은 휴먼 디자인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 아니 제대로 알고자 하지 않는다. 자신을 알기 위해 ‘구매자 위험 부담’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다섯 종의 바나나 우유가 있다. 그러나 각각의 바나나 우유가 어떤 맛을 내는지 당신은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너무도 간단하다. 사서 먹어봐야 한다. 아니면 시음회라도 참석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자신에게 맞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면 말이다. 
 
휴먼 디자인은 ‘진화된 학문’이다. 전적으로 새롭고, 전적으로 혁명적이다. 누구도 이와 같은 학문을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때로 뒷골이 오싹할 정도로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에버랜드의 ‘썬더볼트’같은 느낌이랄까? (갑자기 뒤로 떨어지는 느낌은 처음엔 다소 황당스럽고 소름끼친다.) 
 
이를 ‘분별력’과 ‘인지충격’이라는 단어로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학문의 원리와 구조를 알지 못해, 휴먼 디자인 전체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뿐 더러, 휴먼 디자인 지식이 너무도 파격적이라 이를 소화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린다. 분별력이 없었던 이들은 어쩌면 휴먼 디자인을 알고 나서야 분별력의 가치를 깨닫게 될 수 있다. 
 
보통은 이렇다. 사람들이 LYD 코스에 참여한다. 생각보다 놀랍고 생소한 지식이 많지만, 너무 잘 맞고, 또 도움이 되기에 ‘와, 이런 지식도 있구나.’라며 감탄을 한다. 하지만 진짜 충격은 오히려 LYD 코스가 끝난 뒤에 시작된다. 
 
G센터 ‘미정’인 사람은 ‘방향성’, ‘정체성’, ‘사랑’에 대한 고정된 감각이 없다.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리고 위로를 받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리딩 중에 울기도 한다.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또 지날수록 뭔가 깊은 곳에서부터 삶이 뒤집어 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이 모든 지식들은 뭐지?’, ‘G센터 미정인 나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는 존재인데, 뭐 전략과 권위라는게 있다지만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산단 말인가?’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휴먼 디자인과 연을 끊는다. 
 
휴먼 디자인 창시자 Ra Uru Hu는 수 천 명이 리딩을 받았지만 자신으로 깨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이 대다수 성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이들이 가진 ‘비자아not-self‘는, 비록 자신이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해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타협과 자기기만의 산물이다. 사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던 바가 아닌가? 우리나라 같이 열악한 현실을 살면서 자기타협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신이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내면 깊은 곳에서는 당신을 위한 울림이 나타난다. 모두가 좋아하는 그 길 말고,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내면의 소중한 울림 말이다. 참으로 신기한 건, 평소에 이런 삶을 전혀 언급하지 않던 사람들이 휴먼 디자인만 접하고 나면 마치 자신이 ‘전략’과 ‘내부 권위’에 이미 헌신된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한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웃기는 얘기다.
 
휴먼 디자인 실험은 전적으로 태도에 달려 있다. 100% 그렇다. 태도가 좋지 않던 사람들이 휴먼 디자인을 안다 해서 진짜 실험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마치 패션쇼에 선 모델처럼 ‘나는 내 권위를 따르고 있으니까, 넌 참견마.’ 
 
진실과 거짓은 때로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래서 이를 분별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바디랭귀지나, 목소리 떨림, 그리고 내적 불일치 등의 도구들,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분별할 힘을 갖게 해 준다. 안타까운 건, 많은 나라들에서 이런 거짓과 자기기만을 다루지 못해 휴먼 디자인의 본질을 지켜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갑자기 내부로부터 붕괴가 시작된다. 결국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공인 전문가들과, 지적재산권을 우습게 여기는 블랙 마케터들에 의해 시장이 무너진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럴 뻔한 일이 이미 여러 번 있었다. 
휴먼 디자인을 얘기하는데 뭐 이리 따질 것이 많냐고 머리아파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느낌이 드는게 당연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그 어떤 분야도 투명하게 정착된 사례가 없다. 이 짧은 3년간의 시간 동안에도 ‘좋은게 좋은 거다.’며 물을 흐리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기분이 나쁠 법한 얘기는 하지 않는게 인간의 도리이고, 한국인의 정신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들은 큰 착각 속에 아니,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 
국가로서의 운명이 거의 끝장났다고 해도 좋을 그리스를 생각해 보자. 그리스엔 지도자가 없다. 모두가 부패해 있다. 그래서 세금이 100이 들어오면 40을 상부 관료들이 가져가고, 부처 담당자들이 40을 가져간다. 국고로 들어가는 세금은 불과 20밖에 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러시아는 어떤가? 러시아는 대통령도 뇌물을 받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1년에 뇌물로 움직이는 돈만 300조가 넘는다. 누구도,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다.
 
‘자기기만’이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온갖 핑계를 대가며 자신으로 살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정작 홀로 있을 땐 행복하지도 않고, 비참함마저 느끼면서 말이다. 휴먼 디자인을 알기 전부터 자신으로 살기 위해 투쟁해 온 사람이 아니라면, 휴먼 디자인을 알게 되었다 해서 그렇게 살게 될리는 없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기만’은 공인 전문가, 공인 차트 분석가들에게서도 많이 나타나는 이슈다. 감정 ‘미정’인 공인 전문가는 고객이 싫을 만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다. 이건 ‘비자아’ 상태다. 그리고 ‘비자아’ 상태는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그건 그림자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데 있다. 그건 대다수의 성인들이 이 ‘비자아’ 상태를 ‘합리화’하기에 바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부패는 그렇게 시작된다. 
 
실제로 공인 전문가들이 현장에서 하고 있는 일이란, 그저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분좋게 해 주는데서 끝나버릴 수도 있다. 실력도 안 되는데 어차피 고객은 아무 것도 모르니 이것저것 지껄이면 그 뿐이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분위기가 그렇다. 아픈 사람, 삶이 힘든 사람들을 모아놓고, 본질로 들어가기 보다는 (본질을 다루면 아프니까) 겉표면만 얇게 기름칠을 해 놓고, 나중엔 위로 모드로 들어가 기분 좋게 해 주고, 감동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한국이란 나라는 종교계나 자기계발 업계나 이런 쇼가 판을 치고 있다. 
 
공짜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블랙 마케터건, 아니건, 이게 상도를 위반하는 일이건 아니건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지식을 도둑질해서 임의대로 뿌리고, 마구잡이로 강의를 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냥 공짜로, 아니면 값싸게 지식을 얻으면 그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아는가? 그 공짜음식에 독약이 묻어있다는 사실말이다. 거기엔 휴먼 디자인의 본질이자 정수인 휴먼 디자인 정신이 빠져 있다. 유일한 핵심인 이 정신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전략strategy‘과 ‘내부 권위inner authority‘ 개념도 결국 왜곡되고 악용된다. 
 
휴먼 디자인은 사람을 살리는 학문이고, 앞으로 닥쳐 올 엄청난 위협 앞에 자신으로 생존하게 해 줄 유일한 학문이다. 휴먼 디자인이 나타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휴먼 디자인같은 충격적인 학문이 굳이 필요하겠는가? 왜 잘사는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초를 치겠느냔 말이다.
 
앞으로 별별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 국가적으로 한국은 이미 그리스나 일본의 전철을 밟고 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시스템적으로 별 답이 없는 나라다. 그리고 2027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과연 당신에게 미래가 있을까? 
 
우리는 자신으로 살고,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태어났다. 이게 삶의 목적이고, 이유다. 그러니 엉뚱한 곳에 삶을 낭비하지 말라. 앞으로의 시련은 준비되지 않은 당신이 감당하기엔 무척 벅차고 고될 것이다. 
 
자신으로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눈치 보지 말고, 당장 배움을 시작하라. 자신으로 사는 삶의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다. 그리고 자신으로 살 때만 비로소 ‘자기혐오’를 벗게 될 것이다. 사랑을 찾아 헤매지 말라. 필요한 모든 것은 당신 안에 이미 다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