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파멸의 역학

 

비자아에게는 미래가 없다. 역사학자들은 과거를 추적하거나 미래를 예측함에 있어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분석은 언제나 전체적이어야 한다. 휴먼 디자인은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지식이지만 심층 분석은 비전문가가 개입할 영역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낭만주의적 사고가 깊게 뿌리내려 있다. 삶이 그렇게 무정하지는 않다느니, 역사는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결코 파멸의 시나리오는 작동하지 않으리라는 기대같은 것이다.

 

삶을 오래 산 사람들에게는 어떨까? 어릴 때의 순진한 전망은 40이 넘고, 50이 넘어 대부분 옳지 않은 것으로 판명된다. 50이 넘어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예기치 못한 변수들이, 감당할 수 없는 변수들이 너무도 많다. 장기예측은 실패를 거듭한다.

 

가장 큰 변수가 트랜짓임을 명확히 인식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태양풍의 영향이나 기후 변화의 영향 정도가 트랜짓의 힘을 간접적으로 상징하는 매개체가 될 뿐이다. 예기치 못한 변수이므로, 인간의 사고에 반영되지 않을 뿐 더러 보이지도 않기에 경향파악도 어렵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보다 더 추상적인 힘이 트랜짓이다. 어렴풋이 그 효과를 감지할 수는 있으나 실체가 무엇인지는 헤아릴 수 없다.

 

54번 ‘야망ambition‘ 관문의 트랜짓이 명왕성에 있다. 명왕성에는 어둠이 있고, 재생이 있으며, 변화가 있다. 왜 내가 그토록 끊임없이 54번을 경계하라고 강조했는지 이제는 갈무리할 때가 되었다.

 

54번의 야망은 그냥 야망이 아니다. “Boys, be ambitious.”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이 표현은 우리에게 성공의 야망을 가지라 말한다. (당신의 개인적 야망을 말한다.) 그러나 사회가 바라보는 야망은 결코 아름답고 밝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비자아에게 트랜짓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꽤 많다. 첫째, 무지에서 오는 고통이다. 둘째, 부정확한 이해 또는 불명확한 이해 또는 왜곡된 해석에서 오는 파국적 결말이다. 셋째, 만에 하나 적확하고, 정확한 이해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실제 삶을 전략과 권위대로 살지 않음에서 오는 부패와 그 부패로 인한 비극적 결과다.

 

휴먼 디자인을 대하는 태도가 바르지 않은 사람들에겐 무지가 오히려 100배, 1,000배 더 나은 상태일 수 있다. 의사 간판을 건 돌팔이가 사람을 잡듯,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휴먼 디자인은 저주와도 같다.

 

당신은 여전히 큰 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람은 짧은 순간의 사건, 사고에는 비교적 명확한 판단력을 유지하는데 반해, 장기적이고 점진적인 영향과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색맹이나 다름없는 반응을 보인다. 빨간색을 노란색이라 말한다. 이 오류는 특정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 치명적인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배웠지만 정확한 이해가 없거나, 명징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하는 죄(?)는 언제나 전문가 흉내를 내는 비전문가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긴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전에서 이상한(?) 적용을 한다.

 

당신도 알고 있다. 54번 관문의 야망은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는 사실말이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흥미롭게도 많은 이들이 이 관문을 개인적 용도로 남용한다. 의도된 바에 따르면 이 관문의 본질은 ‘부족적’이다. 개인의 야망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야망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원문에 충실하자면, 이 야망은 반드시 올바른 때에 올바른 초대와 인정으로부터 오는 부족적 파트너십이어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아웃이다.

 

야망은 흥분이다. 처음부터 메커니즘이 그렇게 디자인되었다. 수년간 지속된 이 압도적 트랜짓의 영향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어 당신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뿌리 미정인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해 보라.) 수년간 스트레스를 받는다? 성공에 대한 눈먼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비밀스런 교류를 하고, 어둠으로 들어가고, 뒷거래를 하고, 신분상승을 도모한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영화 <내부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느와르 영화들은 파멸의 역학을 정말 제대로 보여 준다. ‘비자아’ 야망의 끝은 파멸이다. 예외는 없다. 그 끝이라는 것이 언제나 ‘임계점’을 말하는 것이므로, 임계온도를 넘은 물은 반드시 끓는다. 비자아 야망이 끓게 되면 그 끝은 언제나 파국일 뿐이다. 삶은 오직 두 가지 방향으로만 전개된다는 점을 잊지 말라. 명백한 올바름이 아니면, 명백한 파멸뿐이다.

 

누가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운가? 이 점에 있어 뿌리 정의도 예외는 아니다. 작동 방식이 다를 뿐, 압박이 존재하며 이 압박을 제대로 다루고 제대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 야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라. (누군가는 휴먼 디자인 주역의 이런 설명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1 영향

 

명왕성 상승. 개인적 조언자에서 사탄 숭배자까지 어느 곳에서든 비밀 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성취하는 능력. 영향력을 부채질하는 비밀관계를 통해 야망이 힘을 얻음. 

 

금성 하강. 영향력의 관점에서 자신의 힘을 감소시킬 수 있는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으로 잘못 인도된 고집. 공식적 인정을 요구하는 야망으로 영향력을 제한함

 

54.1의 라인값이 이렇다. 음미하면 할수록 이곳에 엄청난 에너지가 존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깊이’, 그리고 ‘바른 태도’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예외로 할 것이다. Ra가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듯, 특히 휴먼 디자인 주역과 같은 수준의 지식은 평소 사회적으로 상식있고 건강한 사람들에 의해 다뤄져야 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 휴먼 디자인 전문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휴먼 디자인 주역은 전통 주역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함축성과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허벅지를 꼬집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인내하여 행간의 숨은 의미들과 고맥락 뉘앙스들을 마치 엑기스를 취하듯 짜내고 짜내야 한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으며 아무에게나 허락된 일도 아니다.

 

54.1의 메커니즘이 바르게 허용되는 순간은 다음의 전제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뿐이다.

 

1)평소 삶에서(휴먼 디자인을 알기 전부터) 좋은 태도, 건강한 태도로 살아온 사람이어야 한다.

 

2)휴먼 디자인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 타협이 없어야 한다. 

 

3)자신의 비자아를 건강하게 직면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54.1의 메커니즘은 언뜻 보기에도 진의를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자칫 라인값 하나만 보고도 나가 떨어지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게 메커니즘이라니.’

 

휴먼 디자인은 선, 악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그렇다 해서 면죄부를 주는 것도 아니다. 메커니즘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규율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규율있는 사람’, ‘규율있는 사고’, ‘규율있는 행동’이 휴먼 디자인이 말하는 올바른 삶의 핵심이고, 핵심이다.

 

전 세계적으로 휴먼 디자인 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학습자들이 이미 다 큰 비자아 에고 덩어리 성인이라는데 기인한다. (Ra는 성인들이 실험한다는 말을 믿은 적이 없다. 그런 태도와 헌신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성인들은 이미 왜곡되고, 왜곡되고, 또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휴먼 디자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할 가능성이 극도로 낮다. 극지방에는 사람이 거의 살 수 없는 것처럼, 이런 극한의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적용하는데 자신을 투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휴먼 디자인 실험은 “저는 열심히 실험하고 있어요.”라는 말과는 단 1%도 관계가 없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입으로 “저는 열심히 실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험의 본질과는 정말이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누구도 실험하지 않으므로, “실험한다.”라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

 

실험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평소 그가 보여주는 태도, 배움에 대한 태도, 실험에 대한 태도, 비자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다. 이를 다르게 말하자면 ‘상자 밖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은 하나도 중요치 않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것을 모르는가? 정치인들의 겉과 다른 이면을 우리가 모르는가? 말로 하는 것은 거의 아무런 중요성도 없다. 오직 그의 실제 삶만이 비자아를 다루는 그의 역량을 대변할 수 있고, 평소의 태도만이 전략과 권위에 대한 실험을 보증할 수 있다. 만약 목센터 미정인 누군가가 초대없이 말하고, 항상 주도하고, 사람들을 이끌고자 현시한다면 그는 100% 비자아다.

 

Ra가 수없이 강조했던 바와 같이 대부분의 성인들에게 있어 휴먼 디자인의 가치는 삶에 대한 오해를 풀어준다는데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혜택이며, 이 하나만으로도 성인들의 고통이 줄어들고, 반감된다. 그러나 실험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휴먼 디자인 영국 리처드 버몬트Richard Beaumont 대표는 자기 평생에 매니페스터가 ‘알리는’ 전략을 따르는 사례는 한국 외에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처음이며, 지금도 유일하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어떻게 휴먼 디자인 후발국인 한국에서 전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전략을 따르는 매니페스터’가 출현할 수 있었을까?

 

매우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다른 나라의 매니페스터들이 알리지 않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매니페스터들이 알리는 삶을 실천한다는 것은 태도에 기반한 실험 문화가 아니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이 불가하다. ‘규율있는 사람’, ‘규율있는 사고’, ‘규율있는 행동’은 위대한 기업, 위대한 사회의 본체일 뿐 아니라, 휴먼 디자인 실험의 유일한 핵심이고 본질이다. 규율없는 휴먼 디자인은 쓰레기다.

 

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고 생각하는가?

 

성공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족적’ 성공이다. ‘끈적거리고’, ‘결속력있는’, ‘비밀스런 거래와 후원에 기반한’ 밀도높은 파트너십이다. 스트레스와 압박으로 눈이 멀다 못해, 전략과 권위를 내팽개치고 그저 마인드의 속삭임만 따라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한다. (영화 ‘더 킹’에 등장하는 한강식 검사의 저 유명한 대사, ‘고도의 정치 엔지니어링’이 바로 여기에 등장한다.)

 

전략과 권위 실험이 말장난이 아님을 2~3년차 학습자들은 다 안다. 모를 수가 없다. 배우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어둠이 지나가고 있다. 길고 길었던 어둠의 장막이 걷혀 가고 있다. 이 얼마나 찬란한 비자아의 끈적거림이었는가? 더럽고, 추한, 비자아 막장 드라마가 한국에서 수년간 방치되어 왔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막장 드라마를 좋아한다.)

 

더 강렬한 뉘앙스는 이렇다. 최근 10여년간 우리에게 제공된 명왕성 장기 트랜짓 관문은 모두 뿌리 센터에 있었다. 모두 압박이고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압박이 결코 아니었다. 최초의 압박은 집단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교정의 압박(58번)이었고, 이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다.

 

두번째 주어진 압박은 개인의 변이와 진화를 추동하는, 강력한 우울감과 쓴맛을 동반하는 투쟁, 싸움, 시비를 거는 압박이었다.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 이렇게 살다 죽을 수는 없다는 압박이었다. 요컨대, 이전의 압박은 집단을 위한 압박이었고, 각 개인을 위한 압박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철저한 개인주의적 트렌드가 도래했다.

 

그런데 54번은 달랐다. 휴먼 디자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38번의 우울한 투쟁을 지나, 곧바로 부족적 야망으로 넘어왔다. 최근 십수년간의 트랜드를 볼 때 이같은 강렬한 움직임은 26번 ‘에고이스트egoist’ 관문이 명왕성에 들어왔던 때를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았다.

 

이 엄청난 끈적거림, 이 엄청난 부패와 타락, 이 엄청난 음모, 뒷거래 이 모든 것들이 끝나가고 있다. 54번 ‘야망’의 힘은 한달 뒤에 사라진다. 이제 우리가 죽는 날까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긴 영향을 제공하는 해왕성도 54번에서 벗어난지 오래다. 천왕성에는 3번 관문이 있다. 천왕성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54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이 미친 압박은 우리 생전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뿌리에는 인지가 없다. 뿌리는 맹목적인 스트레스다. 이제 미친 부족의 시대는 끝났다. 끝났지만 끝났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처절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잘못된 선택을 내렸던, 부패의 역학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막무가내로 밀어 붙였던(실제로는 눈먼채로 미친듯이 내몰렸던)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비자아 부패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갈아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뒷거래, 속임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61번 ‘내적 진실’, ‘삶의 신비’의 흐름 속에 있게 될 것이다. 

 

트래짓은 역사의 진정한 동인이며, 결과이고, 전체 이야기다. 이제 <사피엔스Sapiens>가 들려 주던 이야기보다 더 흥미진진한 새 흐름이 펼쳐질 것이다. 눈을 크게 뜨고 새로운 현실을 주목하라. 트랜드는 트랜짓에서 나온다. 

 

자신으로 올바르게 사는 삶에 헌신한 그대여, 깨어있으라. 하늘의 힘이 그대와 함께 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