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다들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천천히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 그렇다. 언제나 조짐’들’이 먼저 오고, 그 다음 모두를 수렴한 충격파가 뒤따른다. 51번 괘에는 번개가 두번 겹쳐 있다. 앞으로의 시대가 그럴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쇼크가 될 것이다. 쇼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서 국민연금 쇼크를 다뤘다. 3년이 앞당겨 졌고, 그 시기는 대략 2057년이 될 거라는 주장이 있었다. 어제 1999년생 대학생과 리딩을 하며 당신이 연금 수령자가 되기 전에 국민연금이 파산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흡사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27년 전, 단성사와 피카디리 극장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 동네 한 극장에서 <터미네이터2>를 보았다. T-1000이 움직이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영화를 보면서 아마도 처음으로 저런 미래가 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던 것 같다. ‘인류에게 기약할 미래가 남아있지 않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기술발전이 정말 그와 같은 미래를 가져올 것인가?’

 

1997년, 지금으로 치면 40~50만원은 족히 될 듯한 거금을 내고 세계 석학 위성 세미나에 참석했다. (흥미롭게도 지금은 검색조차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저장되는 시대임에도 이 자료는 유실되어 버렸다.) 경영자들과 관련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 나는 최연소 참가자였다. 미래를 보았다. 피터 센게, 피터 드러커, 스티븐 코비, 모자베스 로스 켄트같은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없었던 기라성같은 학자들의 놀라운 강의를 들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 서양식 수평적 사고의 힘과 소통능력도 실감할 수 있었다. 

 

과거가 된 미래는 정말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응답하라 1988>의 장면들은 찰나의 스냅샷처럼 뒤로 휙휙 지나가 버렸고, 어느새 눈 앞엔 IMF가 와 있었다. 우리는 위기를 넘겼다. 그것도 아주 잘. 

 

우리는 지금 더 큰 위협에 직면해 있다. 더 이상 ‘위기危機‘라고는 표현할 수 없는 ‘위협’과 ‘위태로움’만 존재하는 현실이 눈 앞에 닥친 것이다. 한번에 수천 명씩 정리해고가 되고, 모든 산업이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리라고는, 합계 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지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명동의 한복판의 건물이 통째로 비어 있고, 서울 주요 상권의 공실율이 15~20%를 넘어가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청담동 명품거리조차 4곳당 1곳꼴로 매장이 텅 비었다. 그들은 수십억 적자를 내고 플래그십 스토어를 철수시켰다. 

 

 

‘이게 끝인가?’, ‘그 다음 희망이 존재할까?’ 

 

 

2,020년이면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누비게 될 것이다. 아우디는 얼마 전, 독일의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 아우토반에서 30분간 운전자없이 주행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트럭 운전사들과 개인택시 및 운수업 직종이 쑥대밭이 될 것이다. 수백만이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정부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금범위가 확대되고, 세금비율이 많게는 50%를 넘게 된다. 그렇게라도 사회 곳곳의 빈자리를 채워 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뜻대로 될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아둔하다. 감정에 눈이 멀었다. (9개 센터 인간은 감정의 파동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은 감정에 눈이 먼 존재다.) 눈앞의 이익과 충동, 욕망에만 급급하다. 피터 센게는 ‘시간지연효과timelag effect’를 언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년 단위를 넘어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매년 1월 22~23일경 도래하는 41번 트랜짓, ‘판타지’, ‘욕망’, ‘충동’과 ‘압박’의 함정일 수도 있다. 

 

불과 2년도 남지 않았다. 미래학자들이 정부가 해체되기 시작한다고 예견한 시점이 불과 1년 4개월 안밖이다. 정부 관료들은 대체 뭘하고 있을까? 어디까지 땜질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국민연금 전문가 토론을 보면서 이들이 미래를 (패턴에 의존해) 꽤 낙관하고 있음을 보았다. 현실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막연한, 적어도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생각일 수도 있다. 정부가 해체되기 시작하면 과연 세금이 제대로 걷힐 수 있을까? 과연 국민들이 세금을 내려 할까? 국민연금만 해도 그렇다. 2,000만명이 연금을 내고 있지만, 500만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의무라고는 하지만 강제수단은 없다. 앞으로 사회 많은 부분들이 국민적 합의 도출에 실패할 것이며, 정부의 의지는 개인들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할 것이다. 정부가 해체되고 공권력이 축소되면 의무와 강제의 수단도 본질적으로 힘을 잃게 된다. 

 

로봇은 또 어떤가? 로봇은 10년 이내에 인류 직업의 50%를 앗아갈 것이다. 그것도 최소 수준이다. 최소 2명 중 하나는 일자리를 잃는다. 아니 빼앗긴다. 그들이 뭘 하며, 뭘 먹고 살게 될 것인가? 실리콘 밸리에서는 캠핑카들이 도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방 하나짜리 한달 월세가 200만원, 1년에 2,400만원이 든다. 캠핑카 한대는 고작 700만원, 이들은 스탠포드 대학의 화장실과 샤워실을 빌려 쓰며 밤에는 캠핑카에서 쪽잠을 잔다. 불법점거와 강제견인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포기할 수 없다. 미니멀 라이프가 대세인가? 정말 그럴까?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영세업자들에게 미래가 있을까?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감각’이다. 요리에 대한 기본적인 감각이 없다. 일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가 있겠는가? 수많은 40대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고 파트타임으로 연명하고 있다. 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미래의 박카스 할머니, 박카스 할아버지들이 거리에 넘쳐 난다. 

 

한쪽으로 몰아 세우는 느낌이 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개별적 사실들을 넘어선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 시간지연효과를 감안해서 말이다. 전체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래서 뭘 어쩌란 말인가? 

 

아무도 제시하지 못했다. 원인의 원인, 인과의 인과를 말이다. 애초부터 논리적 사고란 실체가 불분명한, (그리고 인간에게만 유용한) 정신적 수사법이다. 다행히 이 논리적 구조물이 현실세계의 삶을 잘 지탱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논리에 목을 매고, 최근까지도 의사, 변호사, 교수와 같은 논리적 엘리트들이 사회를 이끌어 왔다. 그래? 그런데 지금은 왜 이런가? 교수, 의사, 변호사의 사회적 위상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나홀로 소송이 자그마치 80%를 웃돌고 있다. 변호사는 막변이 되었다. 의사 직함을 가지고도 한달에 200~300조차 벌기 힘든 사람들이 넘쳐난다. 교수는 더 이상 잘 나가는 직업이 아니다. 하루 종일 연구를 해도 수입이 얼마 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변하는 이유는 ‘만다라 휠Mandala Wheel‘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휠이 돌고 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래서 흐름을 읽을 수 없다. ‘단절적’ 변화를 예측하지 못한다. ‘단절discontinuity’은 연속성의 결여다. 유추를 통해, 선형적 사고를 통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변이다. 그래서 진화다. 진화와 변이는 인간의 예측을 따르지 않는다. 애초부터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렇다. 

 

인간은 변이에 취약하다. 그래서 종의 교체도 일어나는 것이다. ‘계획의 시대(Cross of Planning, 1615~2027)’는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야만 했다. 첨단 휴대폰과 사물인터넷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편하게 만들었는가? 대중교통 수단과 우편시스템, 실시간 추적이 가능한 택배 네트워크는 또 어떤가? 모든 것이 영원해야만 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있다. 꽤 많은 미래학자들이 또 다른 미래, 낙관적인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글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문명의 412년 사이클이 이제 카운트다운을 시작해도 좋을 정도로 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데 있다. 지난 400년은 경제용어로 표현한다면 ‘인류 호황기’였다. 호모 사피엔스(실제로는 이미 멸종했지만)에게는 ‘인류 호황기’가 마치 대단한, 엄청난 성취처럼 보였을 것이다. 인간은 끝없이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계획의 시대’가 제공한 배경 주파수들은 ‘논리’과 ‘부족’을 최우선으로 하는 패턴에 입각한 끈끈한 부족 연맹체였다. 따뜻했다. 예측이 가능했다. 1961년 이후 우리가 아는 세계는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이 세계는 소멸하고 있다. 휠이 가리키는 다음 방향은 어디일까? ‘잠자는 불사조의 시대(Cross of Sleeping Phoenix, 2027~2439)’는 논리와 부족의 힘을 앗아간다. 감정센터의 변이가 끝나고, 새로운 종이 출현하고, 논리와 부족이 사라진 철저한 개인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우리가 알던 이 거대 도시들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희망고문이라도 앞에 ‘희망’이 붙어 있으니 좋은 거 아니냐라는 말처럼 들린다. 바로 그들이 제일 먼저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보아야 한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냉혹한 유전법칙의 시각에서, 인류 전체의 시각에서 말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면, 이 모든 조각들을 짜 맞추지 못하면 당신은 눈 뜬 채로 버려질 것이다. 쓸모없는 유전자는 언제든 폐기처분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역량에 너무 많은 힘을 주었다. 인간이 이토록 지적이고, 똑똑하니 무슨 문제든 헤쳐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바로 인류가 빠진 함정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뇌를 창조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변이를 일으키지 못한다. 

 

이제 거대한 착각에서 깨어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리얼한 진짜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현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끔찍하고 더 절망적일 것이다. 

 

정부를 믿지 말라. 신이 당신이 구원하리라는 헛된 기대로부터 벗어나라. 붓다와 예수는 7개 센터 존재였다. 그들은 이런 세상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진정성있는 것만이 살아남는다. 투명하고, 견고한 것들만이 살아남는다. 바르게 사는 사람들만이 살아남는다. 누군가에겐 우스운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내게는 이런 사실들이 하나도 우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