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RENDER

중년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작은 선물을 건넸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으므로 그녀와 반갑게 인사할 수 없었다. 

본사를 응원한다고 했다. 본사를 응원한다던 그녀는 국제계약을 존중하지 않았다. 지적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원칙과 규범을 존중하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무척이나 반가운 사람을 만난 표정을 지었다. 멀리서 달려 왔다. 얼굴로 나와 섞이고자 했다. 그렇게 뭔가를 넣어 두려 했다. 

나는 그녀에게 지적 재산권을 존중해 달라 요청했다. 그녀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얼굴빛이 달라진 그녀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몇마디 말을 내뱉었다. 잠시 뒤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몇 년 전 한 중년 남성이 약속도 없이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나는 그에게서 구체적인 용건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내게 타협을 원하는 눈치였다. 원칙을 지키려 애쓰지 말고 길을 열라는 눈빛이었다. 가슴을 파고 드는 역한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가슴 언저리를 계속 맴돌았다. 

한 기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그 기관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뒤늦은 진출이었지만 설명회마다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수 년 만에 많은 리더들이 배출되었다. 몇 년 뒤 기관은 한국에서 철수를 결정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일은 한국이 처음이었다. 

이유는 언제나 같았다. 다를 수 없다. 언제나 같은 이유로 그들은 한국을 떠난다. 한국을 떠난 그들은 다시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다. 

규율과 지침, 원칙에 관심이 없다. 역사가 반증한다. 원칙을 지킨 이들은 고초를 겪고, 매질을 당하고, 유배되었다. 어떤 이는 병에 걸렸다. 어떤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칙을 지켜서 얻는 것이란 지조있는 삶이란 명패 하나 뿐인 경우가 많았다. 독립투사들은 배를 굶는데 친일파는 부귀영화를 누린다. 아무 것도 바로 잡히지 않았고 아무 것도 바로 잡히지 않은 나라에서 부패는 발본색원拔本塞源되지 않았다. 뿌리가 뽑히지 않으면 그 줄기는 언제든 싹을 틔운다. 그 싹은 어둠의 싹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면 미래가 없다. 역사의 교훈이다. 

좁디 좁은 나라는 모든 관계가 학연과 지연으로 얽혀 있다. 그들은 학벌을 묻고, 고향을 묻고, 나이를 묻는다. 빼먹는 법이 없다. 

처음 만난 사람도 한 순간에 고자가 된다. 그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빼앗긴 사람 마냥 고작 한, 두 살 많은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그들의 충고를 받아 삼킨다. 

뱉어내고 싶다. 뱉어내고 싶지만 삼킨다. 삼키고 삼켜 얼굴에 불쾌감이 드러나지 않도록 자신을 조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영토를 빼앗겼다. 더는 돌아갈 곳이 없게 되었다. 나이 한 살 많은 형은 그렇게 나이 한 살 어린 동생의 목줄을 쥘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협박도, 통제도, 아량도 모두 그의 몫이다. 

포지셔닝 절차가 끝나면 사람들은 로봇처럼 움직인다. 사적 의견은 없다. 로봇에겐 의견이 없다. 의견이 없는 사람은 의견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의견이 없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상사님 최고.”, “형 말이 무조건 맞아요.”,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윗사람이 말씀하시는데 까라면 까야죠.”

얼마 전 거대 기업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그들이 실시한 훈련은 정시 퇴근 훈련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정시 퇴근도 훈련을 한다. 경직된 수직 구조는 퇴근을 훈련시켰다. 훈련된 직원들은 다른 훈련도 받을 수 있다. 이 곳은 군대다. 군사조직이다. 다른 의견을 내면 안 된다. 총살감이다. 다른 의견을 내지 않는다. 

혹자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성인들은 자기 안에 엄청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겉으론 정상으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억제된 슬픔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서대문 형무소에서 선조들이 겪었던 일을 되풀이 당했다. 우리 또한 고문 속에 자랐다. 우리도 후대를 고문하고 있다. 맨정신인 사람도 몇 대 맞으면 간첩이 되는 나라다. 종교, 정치, 교육, 예술은 이렇게 고문과 부패로 얼룩져 있다. 얼룩져 있음을 알지만 맞서지 않는다. 맞서는 자는 죽음을 각오하라. 

여성은 맞은편 누군가에게 “선배님 삶은 행복하세요?”라고 질문했다. 뭔가가 번쩍했다. 따귀를 맞았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서 그딴 질문을 하는 사람은 맞아도 싸다. 갈굼을 당해야 한다. 갈궈서 다시는 그런 헛소리를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문과 부패를 통해 주류 사회에 편입한다. 먼저는 고문을 당하고, 그 다음 부패의 일원이 된다. 까라면 까고, 죽은 시늉이라도 하라고 하면 죽어 있어야 한다. 개가 되어야 한다. 주인의 명령을 따르라. 그러면 승진할 수 있다. 능력이 없어도 승진할 수 있다. 승진하면 부패를 저질러도 괜찮다. 뒤를 봐 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분의 지엄한 뜻을 받들었으므로 부패에는 무죄가 선고된다. 

부패를 보고도 침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간단한 이유는 이렇다.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배역을 맡고 있다. 부패를 당연시한다. 유전자에 부패가 각인되었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합리화된다. 

나는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로열티도 내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리딩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어떤 양심으로 고객을 마주 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짜집기한 교재를 가지고 저작권자 행세를 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지적 재산권을 존중치 않으면서 어떻게 휴먼 디자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타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치인이 되어 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어떻게 굽신 거려야 하는지 어떻게 뇌물을 받아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타협이 없다. 그래서 어렵다. 그래서 즐겁다. 그래서 행복하다. 덜 오염된 사람들과 덜 오염된 공간에서 진실을 다뤄갈 수 있음이 기쁘다. 

억눌린 사람들은 해방되기 전까지 다른 이들을 억누른다. 그 길만이 생존의 길이다. 자신을 억누를 때만 생존한다. 자신을 억누르는 사람들만이 생존했다.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자신을 억눌러 오던 사람들은 앞으로도 자신을 억누를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해방시키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 것이다. 그렇게 죽을 것이다. 

내부권위Inner Authority는 진정 우리를 해방시키는 도구다. 온갖 외부권위들과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기반이다. 기초다. 배수진이다. 누군가는 명료함을 따른다. 누군가는 반응을 따른다. 누군가는 직관을 따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해방시킨다. 더 이상 누군가를 쫓지 않는다. 쫓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탁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삶을 담보로 맡기지 않아도 된다. 눈치볼 필요가 없다. 착하게 굴 필요가 없다. 자신을 죽일 필요가 없다.  

바르게 임해야 한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용사들처럼 맞서야 한다. 누군가 당신의 온전성을 위협하면 “꺼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당연시 하면서 왜 당신은 지키지 않는가? 가정을 지키는 것은 당연시 하면서 왜 당신을 지키려 하지는 않는가? 

그렇게 맞서 왔다. 아니 견뎌 왔다. 명왕성에 좌정한 54번 관문은 우리에게 시련을 주었다. 치료제는 전략과 권위뿐이였다. 돌아가는 길이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 안에서 기쁨을 맛봤다. 고통 속에 환희를 맛봤다. 전략과 권위는 자신으로 살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성배다. 전략과 권위는 우리를 지켜 준다. 번영케 한다. 

매일 침범 당한다. 매일 간섭받는다. 매일 감시 당한다. 전통은 당신을 가만두지 않는다. 교리는 당신을 가만두지 않는다. 외부권위는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자신으로 살지 않으면 세상이 당신의 코를 베어갈 것이다. 자신으로 살지 않으면 당신도 부패한 채로 죽게 될 것이다. 

고통은 클 것이다. 대가는 작지 않다. 나이가 들면 고통은 비례해서 커진다. 노화된 몸은 비자아 고통을 감내치 못할 것이다. 고통 속에 죽는다. 보릿고개 시절 나무껍질을 베어 먹으면서도 살았다. 그렇게라도 살아갈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린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자신을 타협시킨 사람은 자신을 잃는다. 그들의 눈빛은 다르다. 그들의 눈빛은 황폐하다. 그들의 눈빛은 죽은 물고기의 눈빛이다. 

며칠 전에도 몇 년 전에도 그러한 눈빛들을 본 적이 있다. 망자와 대화했다.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삶으로부터 잊혀진 사람들이다. 그들에겐 추억할 거리조차 남아있지 않다. 자신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되뇌일 기억이 없다. 

성인들로부터 휴먼 디자인을 지켜내야 한다. 정치로부터 휴먼 디자인을 지켜내야 한다. 지켜낼 수 있으면 진짜로 바뀌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식없는 진짜 변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짜가 된 성인들은 휴먼 디자인을 바르게 전할 것이다. 바르게 전달된 지식은 다음 세대를 살릴 것이다. 다음 세대는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존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이 무엇인지 맛볼 것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자신을 먼저 존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유혹들 속에서도 휴먼 디자인을 지켜내는 이유다. 

갈 곳이 없다. 막다른 골목이다. 비자아는 갈 곳이 없다. 비자아는 비자아끼리 모인다. 독특함은 사라진다. 균질화가 압도한다. 모두의 의견이 같다. 색깔있는 옷을 입었지만 존재는 색이 없다. 어둡고 침침한 삶이다. 가식적으로 웃는다. 하고 싶은 말을 참는다. 실험하지 않는다. 내맡기지 않는다. 지식이 많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누가 감히 이 땅에서 자신으로 살려 하는가? 

누가 감히 이 땅에서 자신으로 살려 하는가? 

누가 감히 이 땅에서 자신으로 살려 하는가? 

 

일어나라. 자신으로 일어나라. 

 

 

휴먼 디자인 한국본사
레이브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