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디자인은 단순한 지적 배움 체계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데 휴먼 디자인만큼 즐거운 분야도 없긴 하죠. 그러나 휴먼 디자인은 실제로 살아보기 전까지는, 살아내기 전까지는 그 참된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제가 초대없이 말하지 않기 시작한, 또는 그런 실수(?)들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교정하는 훈련을 시작한 최근 몇 개월간 ‘자잘한 쓴맛(?)’들이 거의, 또는 완전히 사라진 경험들을 갖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아주 작은 일에도 이같은 주의를 기울이다 보니 이젠 내면에서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돼’라는 식의 목소리가 사라졌습니다. 단지 꾹 참고 초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거나, 답답함을 억누른 채로 ‘누가 나를 초대해 주나.’하는 식의 생각, 두리번거림이 사라졌는 말이죠.요즘엔 이미 맡겨진 일들 또는 이미 초대 관계가 형성된 분들외 어떤 분들에게도 먼저 말을 걸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더욱 말수가 적어지고, 더 고요해졌습니다. 아마 이 사실을 모르는 분이 보시기엔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요.

1/3에 10.2가 정의된 저로써는 아무 때나 사람들 앞에 서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은둔함으로써 자기 사랑을 유지하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죠. (1/3은 자기 내면으로 깊이 몰입된, 12파일 중 유일하게 내적으로 온전히 몰입된 디자인입니다.)

가끔 커피숍같은 곳에서 ‘이것이 현시인가?’라고 고민하게 되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으로부터 어떠한 ‘쓴 맛’도 느껴지지 않을 땐 제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듯 합니다.

휴먼 디자인을 지적 유희의 도구로만 활용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한 번의 실험이, 한 가지 과정을 이수하는 것보다 훨씬 값지죠. 왜냐하면, 실험을 통해 ‘존재의 본성’을 경험하는 순간 존재됨의 목적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이 삶에 초대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초대했을까요?^^)

‘머리Head’와 ‘아즈나Ajna’ 센터를 통해 특정한 것을 생각하도록 초대되었고, ‘아즈나Ajna’와 ‘목Throat’을 통해 특정한 생각을 말로 표현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휴먼 디자인 채널의 대다수가 ‘초대invation’ 채널입니다.)

심지어, 현시자인 ‘메니페스터Manifestor’조차 기다리도록 초대되었죠. ‘메니페스터’는 분명 ‘현시자’이며, 누구에게도 허락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지만, 자신의 내적 권위에 대해서만큼은 그것이 직관이든, 감정적 명료함이든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이나, 되는대로 현시하게 되어 있는 존재는 아니란 얘기죠. 바로 이 때문에 ‘감정 메니페스터’가 자신의 감정적 명료함을 기다리지 않고 현시하면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프로젝터로서) ‘쓴 맛’이 완전히 사라지고, (메니페스터로써) ‘분노’가 완전히 사라지고, (제너레이터로써) ‘좌절이, (리플렉터로써) ‘실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휴먼 디자인을 ‘살아내게’ 될 때, 경험하게 되는 가장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러나 결코 쉽지는 않기에, 소위 ‘영적 의지’라 불릴만한 내적 힘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습니다.

 

삶을 이루는 바탕엔 ‘자기 책임의 원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붓다가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하여..’라고 말한 그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반 사회가 아닌) 우주는 자신을 지킬 힘을 가진 사람들만을 지켜줍니다.

안과 밖이 사실상 동일하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휴먼 디자인의 전략과 주도권(내부 권위)이 바로 그 핵심입니다.

전략과 주도권에 ‘항복surrender’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의도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오직 그 때만 우리 삶의 거대한 그림을 보게 되죠.

오직 ‘항복surrender’ 할 때만, 의도된 삶의 목적과 만나게 됩니다.

수 많은 종교가 추구해 오던 길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더 높은 질서에 순응하고, ‘따르는’ 삶.

‘항복’하는 삶은 몸에 갇힌, 설정된 여러 조건들 속에서

최적화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도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하지 않음’, ‘No Choice!’의 의미입니다.

 

“Love Yourself.”, “No Choice!”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선택하지 않음’으로써만,

주도권을 통해 ‘이미 내려진 결정’을 ‘따름으로써만’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됨Human Being’의 ‘숙명宿命’입니다.

 

 

 레이브 코리아 대표 Paul 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