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저는 제 인생 가장 충격적이었던
두 가지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직장 상사의 부패 사건으로 인해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4개월 동안 각종 기관의 
강도 높은 감사를 받게 되었고, 결국 30년간 이룬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잃고 감옥에 끌려 들어가는 
상사를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암이 재발한 지 3주 만에
‘인생 꿈만 꾸다 간다’라는 말을 남기시고
생과 작별하게 되신 아버지를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당시엔 뇌를 쇠망치로 해머 질 당한 듯한
큰 충격으로 3달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인간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인간이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깊은 의문에 빠졌습니다.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 같은 정신적 고통에 
매일 술에 취해 혼절하지 않으면 잠도 잘 수가
없었고, 만약 몸이 아픈 아내와 갓 돌이 지난 
딸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숨을 쉬고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절망의 시간 속 더 이렇게 살면 정말 좃 된다는
자각과 함께 인생이 더는 같은 궤도로 살 수 
없게 저를 강하게 밀어내버리는 느낌을 받게
되었고, 인생 바닥부터 다시 올바르게 올리겠다
결심하고 모든 걸 놔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미쳤다고 했고, 직장에선 더 좋은
자리를 제안했지만 더이상 저에겐 좋은 자리,
대기업, 높은 연봉은 전혀 삶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직장도 던지고 와이프와 딸마저
친정으로 보내고 홀로 서울에 올라왔을 때
지금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의 행동으로
만나게 된 것이 휴디입니다.
비욘드 유니버시티 팟캐스트에도 언급되었던
이상하게 보인 또라이 아저씨가 바로 접니다.

제가 단박에 휴디 지식의 가치와 깊이를 알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현시하면 안 되는 MG인데 현시하다가 벌어둔 
돈도 전부 날리고 진짜 몸뚱이 하나 남아버렸죠.
정말 그렇게 더이상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는
상태가 강제되어버리고 어설프게나마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16년 3월 제너레이터 워크샵 이후 
감정적 명료함에 따라 당시 괜찮은 직장도
다시 관두고 똥을 펐습니다.

화려한 변신이죠? ㅎ

똥을 푸는 곳은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아서
책을 볼 시간이 많았고 마음껏 휴디의 관련
지식을 탐구하고 의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전 프로파일 1/3에 16-48채널 
깊이깊이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의심쟁이 
녀석이거든요.

그런데 휴디를 알고 실험을 시작했다고
제 삶이 극적으로 좋아졌을까요?

제 경험으로 비추어 보자면 아닙니다.
더욱더 주변 사람들의 극도 저항과 
삶의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수술을 받고 나온 와이프의 눈이 달걀처럼 
흐물거리고 부어올라 바닥으로 쏟아질 것 같아
보였던 게 잊히지 않네요.

그래도 버텼습니다. 
사실 다른 방법도 없었고요.

정말 돈도 없고 상황이 좋지 않아 강의를
듣지 못하는 순간엔 팟캐스트를 계속 들었고
또 들었습니다.
이 팟캐스트가 저에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대표님, 권세리 디렉터님, 이원재님, 신승미님
감사해요!!! (꾸뻑 x 1000)

그리고 천둥번개가 쳤던 주역 강의!
전 이 강의를 받은 날 제 인생 새로운 궤도의 
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후 계속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 돈은 예전보다 1/3 정도로 벌지만 
기이할 정도로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습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심지어 카토그라피 수업을 들은 이후엔 
몸이 단단해진 느낌도 듭니다.

전 아직 풀어야 하는 숙제와 난관이 분명히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큰 걱정은 되지 않습니다.
이미 휴디 지식을 통해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조금이나마
올바른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죠.

제 과거를 한번은 정리하고 털고 싶어서
긴 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봤습니다.

앞으로 다시 쓸 인생의 이력서를 위해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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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서 나오던 날이 기억난다.

의사는 본인이 손 쓸 방법은 없지만
퇴원은 못 한다고 막아섰고,
아버지께서는 그대로 환자복을 벗으시며 
가자고 말씀하셨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노랗게 변하신 아버지께서는
본인 생의 마지막 저물어감을 그렇게
담담히 맞이하셨다.

그 시절 난 개새끼들의 비리를 덮기 위해
몇 달간 고군분투하느라 아버지의 상태도 
모르고 있었고…

고작 아버지께서 낯선 서울이 아닌 전주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드렸다.

그날 내려오던 차 안의 먹먹한 침묵.
울지 않기 위해 꽉 부여잡은 운전대.
밖을 무심히 쳐다보시던 아버지의 노란 눈빛.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