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YD워크숍 후기 _ 이희영님휴먼 디자인을 접한지 두 달쯤 된 것 같다. 처음엔 ‘소신 없이 흔들거리고 중심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헤드/아즈나/G센터 미정)’ 한심한 내가, 아무리 운동을 해도 소용없는 저질체력을 갖고 있는 (천골 미정) 나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한 수준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보들이 기가 막히게 정확히 맞아떨여저 지금은 끔찍하게까지 느껴진다.난 정말 남을 밀어내는 매니페스터의 견고한 아우라를 가졌고, 내가 원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려 할 때 그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는 ‘자유’뿐이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면서 좋다고 생각한 전부 역시 나를 간섭하고 가로막는 소위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뿐, 다른 그 어떤 것도 없었다. 나라는 존재는 먼저 시작하고 행동해야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존재임을 내 머리가 아닌 내 몸이 먼저 알고 반응하며, 결국 난 내 몸에 항복(Surrender)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항복’이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하구나 느껴지기도 했다.

휴먼 디자인은 기존의 나의 모든 상식을 뒤흔들어 놓았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존엄이란 것에 대해, 온전한 이해와 사랑이란 것에 대해, 나의 몸(기질)이란 것에 대해, 의지와 성공에 대해, 의사결정을 하고 타인과 관계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 그리고 난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등, 단순히 좋은 태도를 가지세요. 사랑하세요와 같이 뜬구름 잡는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휴먼 디자인은 매우 본질적이고 고차원적이면서도 실용적 수준에서 개개인이 적용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지침들을 제공하고 있다. 물론 삶에서 적용하여 변화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지만 말이다.

여성 매니페스터의 조건화

내 몸이 매니페스터의 작동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음을 인지한 이후부터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짜증이 시시때때로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표면상 ‘극도로 답답함’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내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그 근원에는 뿌리 깊은 분노가 있었고, 난 그 분노조차도 표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왜 지금 자유롭지 못할까?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저장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있었음을 알았다. 내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여성’으로서의 피해 의식이 전부였고 그 기억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내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난 전주 종가집 1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요즘 세상에 상상조차 할 수 없겠지만 우리집은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을 구호처럼 외쳤고, 난 ‘여자가~’라는 소리를 매번 입버릇처럼 들어야 했다. 우리 엄마는 아들인 종손을 낳아 종부로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고, 언니 2명도 모자라 세 번째로 이 세상에 나온 여자사람인 나는 당연 태어날 때부터 천덕꾸러기였다.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 엄마는 며느리로서 인정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나와 남동생 도시락 반찬의 질은 사뭇 달랐고, 나는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유치원이란 곳에 내 남동생은 전주에서 최고가는 유치원에 버젓이 다니곤 했다. 이런 탓에 한동안은 (정말 웃긴 일이지만) 유치원을 못 나왔다는 게 제일 숨기고 싶은 과거였을 정도였다.^^

#직장에서

일일이 열거하긴 어렵지만 이런 ‘여성에 대한 피해 의식은 유독 남성권위주의적 문화가 지배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해만 갔다. 여성으로써 여러 종류의 비합리적인 피해를 겪으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놀라운 사실은, 내가 이런 종류의 피해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합리적 수준에서 정당한 보상을 요청했거나 나를 충분히 PR했을 법도 한데 난 정말 어이없게도 겸손과 배려가 지나치고 성실하기 그지없는 착한 여자 직원이었다. 우리 사회가 좋아라하는 메니페스터로서의 실행력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도 했지만 이 역시 활용당하기 일쑤였다.

과거의 기억 그러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도한 크고 작은 기억들로 인한 후유증이 나를 계속 피해 의식 속에 머물게 한 것 같다. 이러한 피해 의식으로 인한 뿌리 깊은 분노는 내 삶에 무기력으로 빈번히 나타나고, 대부분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적당히 남에게 맞춰주는 삶을 살아가게 했다. 정보에 종속된다는 게, 조건화 된다는 게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는 것이라니 그 정보의 힘이 실로 놀랍게 다가왔다.

최근 왜곡된 배움으로 일그러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대학생들의 삶을 매우 흥미롭게 고발한 EBS 다큐 프라임 6부작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가 지난 설 연휴에 마무리됐다. 최종회인 6부에 소개된 Y대 어느 철학과 교수님의 강의와 한 20대 초반 남학생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과연 남에게 보이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건가? 아니면 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